출처: www.hani.co.kr/arti/opinion/column/622570.html
글쓴이: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전두환의 폭정이 극에 달했던 1980년대 중반, 미국의 인권단체 아시아워치위원회가 남한에 조사단을 파견한 적이 있다. 위원회는 민주화 단체와 재야인사들을 만나 생생한 증언을 청취하였다. 아시아워치는 이 조사에 근거하여 1986년 초 방대한 보고서를 펴냈다.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 대학에 대한 감시와 개입, 반체제 인사들의 가혹한 형기, 노동운동의 폭력적 억압, 언론인의 추방과 재갈 물리기, 출판물 검열 등이 상세하게 열거되었다. 특히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고문 관행이 심각한 인권유린으로 지적되었다. 레이건 행정부의 대 한국 정책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남한의 민주진영으로서 크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보고서 중 한 챕터가 북한 인권문제에 할애되었다. 집필자는 브루스 커밍스, 당시 워싱턴대학 교수였다. 커밍스 교수가 파악한 북한의 인권은 한마디로 짙은 안개에 뒤덮인 상태였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 중 하나, 언론자유나 표현의 자유가 단지 억압되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였다. 적어도 국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집회 및 결사의 자유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학생들의 자유로운 발언과 체제 비판, 독자적인 정치조직, 이런 것들을 논하기 어려운 나라였다. 애초 아시아워치는 남북한 모두에 조사단을 파견하려고 했으나 북한에는 입국조차 할 수 없었다.
북한 인권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북한 인권 문제에는 남한과의 대비가 언제나 배경에 깔려 있다는 점, 그리고 냉전이라는 특수한 이념 대결구도 하에서 인권을 균형 있게 보기가 어려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 당시 남한은 형식적으론 민주체제이면서 극단적으로 인권 탄압을 하는 나라, 그러나 그나마 반민주 현실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기준이 있는 나라였다. 반면 북한은 평가기준 자체가 다른 나라였다. 전자는 인권유린 리스트가 길게 나오는 나라였고, 후자는 그런 리스트를 작성하기도 어려운 나라였다. 그렇다면 남북한의 인권 우열을 가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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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정치도구화는 원래 냉전의 산물이었다. 냉전 당시 동서 진영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인권을 경쟁적으로 오용했다. 미국은 시민·정치적 권리로써 소련을, 소련은 경제·사회적 권리로써 미국을 난타했다. 이런 양분구도 때문에 국제앰네스티는 냉전 시절 양심수 명단을 발표할 때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비동맹 진영 사이에서 기계적 균형을 맞추어야 했다. 앰네스티는 모든 쪽에서 욕을 먹었지만 그 점을 역이용해 모든 진영의 비판들을 모아 책자를 간행하기도 했다. 두루 욕을 먹는 것 자체가 인권단체의 공정성을 입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한반도에선 냉전이 현재진행형이다. 남한의 인권단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냉전 당시의 국제인권운동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인권운동은 교실에 비유할 수 있다. 학생들이 걸상에 앉아 있고, 앞쪽에는 칠판이 있다. 칠판은 인권의 수직적 차원이다. 여기엔 인권의 기본원칙들이 적혀 있다. 모든 인권이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는 보편성, 인권 목록은 나눌 수 없고 크게 한 덩어리로 보아야 한다는 불가분성, 빵과 장미가 다 필요하다는 원칙, 인권 목록이 서로 기대고 있다는 상호의존성, 유엔을 포함한 국제인권 규범에 대한 동의, 인권은 인권적인 방식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평화적 원칙 등이 그것이다.
걸상들은 인권의 수평적 차원이다. 각각의 걸상은 인권운동의 여러 영역을 상징한다. 여성인권, 장애인권, 노동인권, 언론인권, 집회결사인권 등등. 어떤 영역에서 활동하든 간에 인권 운동가라면 칠판에 적힌 인권의 대전제에 동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 반대운동을 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이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한 유엔의 권고에 원칙적으로 동의해야 정상적 인권운동이라 할 수 있다.
북한 인권운동 걸상에 앉아 있는 단체 중 상당수가 칠판에 적힌 원칙을 외면하거나 편리할 때에만 활용한다. 이들은 엄밀하게 말해 북한인권운동이 아니라 북한 타도운동을 하는 단체들이다. 인권 교실 내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 반대로 칠판의 대원칙에 동의하는 전통적 인권운동 중에는 북한 인권 걸상에 앉아 있는 단체가 드물다.
그런데 북한 인권에 관해선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북한 인권운동 걸상에 앉아 있는 단체 중 상당수가 칠판에 적힌 원칙을 외면하거나 편리할 때에만 활용한다. 이들은 엄밀하게 말해 북한 인권운동이 아니라 북한 타도운동을 하는 단체들이다. 인권 교실 내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
(중략)
인권의 정치화를 거부하되, 인권이 결국 정치적 역학 속에서 구현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북한인권법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시리아 인권법은 만들지 않으면서 북한인권법을 제정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인권의 정치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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